투자정보 다루는 운용역 퇴사 후 재취업제한과 기밀유출방지 등 관리대책 시급

[데일리비즈온 안옥희 기자] 550조원이 넘는 국민의 노후 대비 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에서 기밀정보가 유출돼 파문이 일고 있다.
공공기관인 국민연금에서 이 같은 내부 기밀정보 유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고 민감한 정보를 유출한 직원들이 다른 금융기관으로 재취업하고 있는 실정에도 무책임한 대처로 수수방관하고 있어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민연금 내부 감사에서 퇴직예정자 3명이 공단의 웹메일로 기금운용 관련 기밀정보를 전송한 사실이 확인됐다.
기밀정보를 유출한 퇴직예정자 3명은 실장 1명, 일반 직원 2명으로, 이들 모두 다른 금융사로 재취업이 예정돼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위원회 부의 안건·프로젝트 투자자료·투자 세부계획 등 민감한 기밀정보를 개인 소유의 컴퓨터와 외장하드 등에 저장했다. 이는 기금운용 관련 기밀유출 금지와 비밀엄수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
특히 고위직인 실장이 기밀정보 유출 관련 감사로 사직서가 반려된 사실을 알고도 재취업 기관인 N증권사로 출근하는 등 영리업무와 겸직금지 의무, 직장이탈금지 의무도 위반해 운용역들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장 외 일반 직원 2명도 N증권사로 이직할 계획으로 전해져 해당 증권사가 정보를 얻기 위해 조직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은 이 같은 사실을 통보받고도 세부적인 경위 파악, 인사 조치, 감사 보도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실장의 재취업 사실을 알고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공단 웹메일을 점검해 추가 기밀정보 유출을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더군다나 이들이 내부 정보를 유출한 시점인 지난해 말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것과 관련한 검찰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앞서 국민연금은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로, 합병에 찬성할 경우 수천억 원의 손실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 같은 민감한 문제를 외부 전문위원회로 넘기지 않고 내부 투자위원회만을 거쳐 의결권을 행사해 논란이 됐다.
기밀정보 유출 문제 작년 국감에서도 지적돼
문제는 기금운용본부의 내부 정보 유출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4년 전인 2013년에도 직원이 자산운용사 대표에게 중기자산배분 내용을 담은 계획서를 유출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인력 유출에 따른 부작용과 퇴직자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 문제가 거론된 바 있다.
전혜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본부의 주요 직책인 A수석이 퇴직 후 4일 만에 한 자산운용사 대표로 재취업했고, 국민연금은 이 금융사에 11차례에 걸쳐 2800억 원을 추가로 배정했다. B실장은 퇴직 후 또 다른 자산운용사 최고정보책임자(CIO)로 재취업했는데 국민연금은 이 금융사에 총 1조9000억원을 배정했다.
전 의원은 본부 운용역이 민간업체로 이직한 이후 본부가 해당 업체에 주식 위탁자금을 밀어주기 식으로 배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기금운용본부 퇴직자가 재취업할 때 기관과 유착해서 불공정한 거래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성일종 새누리당 의원도 2010년 이후 기금운용본부 퇴직자 81명 가운데 다른 금융사로 재취업한 경우가 63명(77.8%)에 달했고 퇴직자 63%의 근속연수가 3년 이하였다며, “퇴직자들이 스펙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이용하고 있다”고 관련 대책을 촉구했다.
또한, 국민연금은 연금심사위원회 회의를 매번 특급호텔에서 열어 기금을 흥청망청 쓴다는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지난해 9월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국민연금공단 위원회 현황 및 회의내역’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연금심사위 회의를 매번 서울 내 특급호텔에서 진행했고 매 회의마다 장소임대료 및 식사비용으로 60만 원 이상, 연간 1400만 원 이상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회의 후 심사위원들에게 회의수당으로 30만 원씩 지급해 2013년부터 회의수당으로만 1억5270만원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복되는 도덕적 해이 원인은 구조적인 문제와 금융사들의 '국민연금출신' 선호
금융업계 일각에서는 심각한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반복되는 원인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꼽고 있다. 550조원의 대규모 공적 자금을 운용하는 기금운용본부 운용역들은 국민연금 소속 공무원과 달리 3년 계약직이며, 연봉도 업계의 80% 수준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민연금이라는 큰 조직에서 큰 자금을 운용한 경력을 가지고 퇴사하면 대우가 달라진다. 기금운용본부 출신이 보유한 각종 투자 자료와 정보들을 다른 금융사에서 활용하기 위해 이들에게 높은 대우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평생직장이 아닌 경력을 쌓기 위해 잠시 거쳐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져 내부통제가 잘 안 돼 기밀자료 유출 등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오는 25~28일 서울에서 전북 전주로의 이전을 앞두고 있는 기금운용본부는 현재 인력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기금운용본부는 올해 들어서만 운용역 8명이 사의를 표명, 20명 안팎의 운용역이 퇴사할 예정이다. 지난해 퇴사한 28명까지 포함하면 약 1년 만에 운용인력 50명 이상이 그만둬 인력 이탈로 인해 국민 노후자금 운용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번 기밀정보 유출사태가 인력 이탈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맞물린 결과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인력과 더불어 재취업 제한 등 더욱 엄격한 기밀정보 유출 방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