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고 다치지도 않았다.

“타보체(6,564m) 북동벽에 도전하는 행위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이다. 3분의 2는 미쳐 있어야 하고 3분의 1은 술에 취해 있거나 루트에 대해 전혀 무관심해야 한다.” 1984년, 쏟아지는 대형 낙석사태로 황급히 철수했던 존 로스켈리는 1989년 1월, 제프 로우와 함께 이 불가능의 벽에 다시 도전했다.
로우는 요세미티에서 많은 초등에 성공했지만 빙벽과 알파인 거벽등반, 동계 단독등반,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의 암릉에서 그 명성이 더 알려졌다. 로스켈리와는 등반경력과 체격, 나이가 비슷했지만 인생항로는 많이 달랐다. 로우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자생적인 히피족으로 자유분방하게 생활했고, 로스켈리는 광산이나 농촌의 보수적인 환경에서 백인 노동자층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89년 타보체 등반을 준비할 때 그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에 쉽사리 흔들릴 정도로 충동적이지 않았고 각자 결혼해서 가족을 구성했고 신용카드도 생겼다. 무엇보다 직장에 취직했다는 커다란 변화를 수용했다. 파미르에서 만난 지 15년 만에 그들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1월 25일, 페리체에 도착하여 루트 정찰을 한다. 짐 무게가 최대의 적이 될 것 같다. 12일을 계획했지만 8일로 수정했고 식량도 캔디바와 동결건조한 과일, 수프 등 고칼로리 음식으로 포장하여 짐 무게를 줄였다. 각자 135kg의 짐을 4,880미터 지점의 전진캠프까지 올렸다. 타보체 북동벽을 처음으로 붙는다는 것은 확실히 감동적이었다. 새로운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벽의 하단부에서는 크랙이 불완전하여 고전할 것 같지만, 상부로 갈수록 경사도가 급해도 크랙이 잘 형성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로우가 선등을 한다. 로스켈리는 최근 몇 년간 활발한 등반을 하지 못해 감각이 무디어져 있었다.
처음 20여 미터는 순조롭지 않았지만, 곧 인공등반으로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거지? 나에겐 아이와 농장이 있고 이 짓을 하기에는 나이(당시 42세)를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미친 짓이야”라며 속으로는 “아저씨, 나 좀 살려 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로우에게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로우는 능숙한 동작으로 좁은 크랙과 얼음으로 된 병목구간을 한 마리의 나비같이 가볍게 돌파했다. 그가 혼합등반의 최고라는 명성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벽등반을 할 때는 전체 구간을 생각하지 말고 바로 앞에 있는 구간이 마지막 피치라고 여기고 등반하라”는 로우의 외침에 로스켈리는 다시 벽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짐 올리는 방법은 경험과 기술보다 지형에 의해 결정된다. 요세미티식 홀링으로는 이 벽에서 어려울 거란 판단에 따라 각자 배낭에 짐을 나눈다.
하지만 오버행과 얼음, 바위의 혼합등반과 수직의 벽에서 쥬마링하기에는 무지한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3종 경기의 철인이 된 것 같다. 오후 4시 첫 번째 비박에 들어갔다. 로우의 원터치 비박용 텐트가 온전하고 안락한 숙소를 제공했지만, 로스켈리의 해먹은 오래 되어 말썽을 피웠고 그래서 허공에 내던져버렸다. 그때부터 로스켈리는 자연이 제공하는 자연숙소에서 비박을 해야 했다.
러시아워의 고속도로에서 길을 잃은 개가 생각이 날 정도다. 다음날 아침 로스켈리에게 뇌수종 증세가 나타나 회복을 위해 페리체로 급 하산했다. 로우는 고소순응이 되었지만 로스켈리는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곳까지 너무 빨리 온 게 원인인 것 같다. 로우의 경험과 연륜이 넓은 이해와 아량을 보여 흔쾌히 동의했다.
며칠 후 첫 번째 비박지로 향한다. 다시 뇌수종 증상이 나타나면 타보체와 함께 히말라야에서의 등반을 포기할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로우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로스켈리가 등반을 포기하면 그는 단독으로 도전할 것이다. 그의 눈빛과 준비하는 태도를 보면 단독등반도 계획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의 단독등반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우리 중의 하나가 낙석에 부상을 입는다면... 그래서 상대방과 연결된 로프를 끊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갑작스런 폭풍우로 갇히게 되면 이 벽에서 과연 탈출로를 확보할 수 있을까?” 등의 상념으로 무거워진 발걸음이었지만 이미 전진캠프에 도달했다.
다음날 둘은 활기찬 등반을 시작한다. 양파껍질보다 좁은 크랙을 암벽화를 신고 넘어선다. 로우가 대부분의 루트를 선등하고 짐을 올린다. 고단했던 하루가 지나고 벽에 매달려 다시 얼음을 녹이는 긴 작업에 들어갔다. 타보체 벽의 크기는 꽁꽁 얼어붙은 한밤에도 줄기차게 얼음과 바위를 아래로 떨어뜨렸고 조용한 법이 없다. 잠을 청해 보지만 오로지 믿는 피신처는 벽뿐이다.
다음날 중앙 걸리 밑에서 암빙이 혼합된 넓게 벌어진 크랙에 봉착했다. 알파인 등반의 극치에 달하는 역겨울 정도의 급경사 지대다. 로우는 기차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기찻길을 거꾸로 오르듯이 필사적으로 그의 아이젠과 아이스바일에 집착한다. 5,600 미터 고도에서 3일째 밤을 맞는다. 갈증과 탈진으로 인한 고통으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다음날은 로스켈리가 선등에 나선다.
오른쪽 아래는 아이젠으로 얼음을 찍고 왼쪽 아래는 바위 턱을 밟고 왼손으로는 아이스바일로 얼음 위를 걸고 오른손으로 크랙을 더듬는다. 다음 동작은, 또 다음 동작은? 복잡한 계산에 더 고통스럽다. 이 중앙 걸리는 어디에서 끝이 나는 건지? 로우와 선등을 교대하며 걸리가 끝나는 오버행 밑에서 차 한 잔 마시고 깊은 잠에 빠진다.
새벽에 그들은 갑작스런 낙석사태에 정신을 못 차린다. 엔진달린 유성이 쏟아지는 듯한 거대한 낙석이다. 잔뜩 위축이 되었지만 오히려 생존에의 의지를 다진다. 계속된 긴장으로 그들은 정오 무렵 등반을 중지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면서 이상한 조짐이 나타난다. 폭풍우가 다가오는 징후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야간등반을 감행한다.
이 급경사 지대에서 폭풍우에 갇히게 된다면 식량과 연료가 부족한 그들은 치명적인 결과에 직면할 것이다. 날이 새면서 구름이 몰려온다. 그들은 간신히 동굴을 발견하고 피신했지만 이번에는 로우가 고산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고소에서의 산소결핍은 뇌수종이나 폐수종으로 직결된다. 그의 병력으로 보아 뇌수종이 잠재적인 위협이다. 등반 개시 후 처음으로 가까이 붙어서 잠을 청하지만 가장 긴긴 밤이 흐르고 있다. 로우가 회복되지 않으면 하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밤새 폭풍우로 시달렸지만 로우의 의지는 강력했다. 그는 저산소와 배고픔으로 느리게 진행했지만 끊임없이 고도를 높였다. 기력을 회복한 로우 덕분에 등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폭풍우도 다행히 카라코람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정상을 60여 미터 남기고 8일째 마지막 비박에 들어간다. 그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고 다치지도 않았다.
2월 13일, 나뭇잎에 이슬이 맺히듯 새로운 새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로우와 로스켈리를 깨우기 위한 훈풍이 속삭이며 히말라야의 평화가 그들 주위를 감싸고 있다. 낙석과 낙빙의 바다를 건너온 그들은 서로 아무 말이 없다.
로스켈리는 1984년 에베레스트 등반을 떠나기 앞서 스폰서인 듀퐁사로부터 자사의 이미지 마케팅을 위해 산소통을 이용해 달라고 요청받았었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고도에 대한 도전인데 산소통을 이용하여 고도를 낮춘다면 무엇 때문에 히말라야에 가느냐”며 거절했었다. 정상에 오르는 행위는, 어떻게 그 정상에 오르느냐 하는 선택된 방법의 결과지 정상 등정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명성과 부는 강력한 보상수단이 되지만 인생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수여하는 보상만이 영원한 것이다.
타보체는 로스켈리가 경험한 등반 중 최고의 등반이었다. 기술적으로 고난도의 어려운 루트를 돌파해서가 아니다. 더욱이 동계에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친구로 등반을 시작해서 친구로 등반을 마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평가도 그 어떤 통계기록도 이보다 더 가치있는 사실은 없다. 성공의 확률을 채울 수 있는 기회는 팀이 하나가 될 때다. 그 둘은 인생의 적절한 시기에 만나서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되었고 그래서 타보체를 오를 수 있었다.
■ 글ㅣ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